공포에 대해서 글을 쓰다 보니 몇 년 전에 꾼 꿈 중에 정말 공포스러웠던 꿈이 있어서 글을 남겨본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꿈에서 경험하는 사건들에 감정적인 몰입이 정말 크게 일어나는 때가 종종 있는데
내가 정말 그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볼 때는 영화 캐릭터가 슬퍼하고 화내고 기뻐하는 것을 관찰할 뿐이지만
꿈속에서는 내가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한다.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에 잠에서 깬 후에 다시 잠들지 못할 정도로 무서웠던 꿈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남겨보려고 한다.
꿈의 내용은 정말 단순하고 배경도 단순했다.
나는 이 꿈에서 여자였는데 어떻게 알았냐 하면 머리가 길었고
굉장히 높은 목소리로 가사 없이 허밍으로 부드럽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는 서서 어떤 여자 아이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앞에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있었는데 그 거울로 머리를 빗겨주고 있는 나와 의자에 앉아있는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런데 거울의 높이가 약간 모자란 탓인지 아니면 각도의 문제인지
내 얼굴은 입까지만 보이고 그 위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 머리도 등허리에 닿을 정도로 길다는 것 정도만 보일 뿐.
방은 매우 넓었는데 거울 뒤 너머로 방의 입구처럼 보이는 큰 문이 하나 있었다.
방에는 가구 하나 없이 흰색으로 칠해진 벽과 바닥만 보였다. 나는 분위기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깐 노래를 부르면서 머리를 빗겨주고 있는데 거울 너머의 문이 열리면서 어떤 남자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짓으면서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슬프거나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 남자를 보고서는 머리를 빗기던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어
머리를 빗겨주던 여자아이의 목을 찔렀다.
노래는 계속 부르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피와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는 나의 입이 보였다.
그러고 나서 잠에서 깨어났다.
이 꿈이 그렇게 공포스러웠던 이유는 감정의 몰입 때문이었는데
'꿈속의 내가 느꼈던 살인마의 감정이 소름 끼쳐서'가 아니라
'꿈속의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게 너무 생생해서였다.
가구라고는 전혀 없는 황량한 방인데도 분위기가 좋다고 멋대로 상상을 하면서
기분이 좋다고 생각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입은 웃고 있었지만
사실 끝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구덩이처럼 아무런 한 톨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솟구치는 피를 보면서도 그리고 아이를 향해서 울면서 뛰어오는 남자를 보면서도
그 표정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매우 낯선 경험인데
보통의 사람은 무뚝뚝하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공감과 감정을 항상 자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꿈속의 경험을 하고 나서 그것을 극명하게 느꼈는데
시각적으로 비유를 하자면 멀쩡한 얼굴에 눈이나 입이 없는 사람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완전히 비슷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상상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꿈속에서 나는 전혀 무섭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지만
꿈에서 깨고 나서는 그 끔찍한 공허함에 덜덜 떨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꿈속에서의 상황이 무서웠던 게 아니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감정의 이입이 정말 소름끼지게 공포스러웠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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